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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도사가 된 당(唐)의 ‘金仙’ ‘玉眞’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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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자운
등록일 16-01-31 20:19
조회 542
여도사(女道士)가 된 당(唐)의 ‘金仙’ ‘玉眞’ 공주
당(唐)나라의 여러 제왕 중 가장 도교(道敎)를 숭상했던 현종(玄宗)은 일찍이 도교의 부록을 전수받았고 양옥환(양귀비) 역시 여도사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녀의 도호는 태진(太眞)이었다. 현종은 측천무후의 아들인 예종(睿宗)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숙명황후 유씨였다. 그가 태어났던 시대에 제국의 실권은 전적으로 조모 측천무후의 손에 있었고 예종은 명목상의 황제에 지나지 않았다. 현종은 과거 측천무후(則天武后)와 위씨가 불교의 세력으로 이씨왕조를 찬탈, 예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황제에 올라 15년간 대주(大周)를 세웠던 사실을 반면삼아 대대적으로 숭도(崇道)정책으로 도교의 지위를 높이 주창하고, 강력히 도교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로부터 당시대 도교의 전성시대가 형성되었고, 도교발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종은 여러 차례 친히 현원황제의 묘를 배알하고 老子의 존호를 ‘대성조현원황제’ ‘성조대도현원황제‘, ’대성조고상대도금궐현원천황대제‘ 등으로 높이 올려 추봉했다. 더불어 전국 각지에 노자 묘를 세우고 크나큰 태상노군(太上老君)상을 만들어 봉안하도록 했다. 현종은 또 자신의 상을 백옥(白玉)으로 만들어 현원(玄元)의 상(像) 우측에 시종하도록 하여 노군(老君)을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숭고한 지위로 만들었다. 또한 국립도교학교를 세우고 도장(道藏) 3744권을 편찬하고 친히 도덕경(道德經)에 주(注)를 달았으며 도교 경전으로 과거를 볼 수 있는 도거제도(道擧制度)를 제정했다. 그리고 장자(莊子)를 남화진인(南華眞人)으로, 文子, 列子, 경상자(庚桑子)를 각기 통현진인, 충허진인, 동허진인 등으로 봉하고, 이들의 저서를 진경(眞經)으로 삼았다. 천보 10년에는 친히 내동장(內道場)에서 여러 도사에게 보허성운을 가르쳤다. 현종이 도교를 독실하게 숭상하니 조정의 대신 중에서 도교를 믿는 자가 많아졌다. 예컨대 재상 이임보 등은 모두 자신들의 주택을 도관(道官)으로 삼았고, 태자의 빈객인 하지장도 도사가 되길 주청했으며, 시인 이백도 도교에 입문했다. 당시 천하에 도관이 숲을 이룰 정도였다고 하는데, “당나라가 개국한 이후, 도교(道敎) 궁관(宮官)이 약1,900여 소, 도사(道士)는 1만 5,000여 명에 달했다”고 했다. 사대부와 백성들이 자신들의 주택을 도관(道官)으로 만든 것을 합하면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金若成, 世可度 金不成, 命難固 -皇帝九鼎神丹經- 金丹이 이루어지면, 世上을 超脫할 수 있고, 金丹을 못이루면 性命도 보존이 어렵다. 공주가 도사가 되는 것은 당왕조의 기이한 관습이었다. 당 황실에서 첫 번째로 여도사가 된 공주는 예종의 누이인 태평(太平)공주였다. 즉천무후는 자신의 모친인 양씨가 별세하자 그녀를 추도하기 위해 태평공주를 여도사로 만들었다. 그러나 태평공주가 여도사가 된 것은 단지 외관적으로 도포만 입은 것일 뿐 실제로는 황궁에 거주하면서 변함없이 공주의 특권을 누렸고 결혼을 했으며 뒤에 황실의 권력다툼에 세 차례나 가담해 결국 목숨을 잃었다. 따라서 명목상 도사였지 진정한 도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현종의 친누이였던 서성공주와 융창공주는 진짜 여도사가 되었다. 즉천무후가 죽은 후 예종은 자신의 여덟 번째 딸인 서성공주(西城公主)와 아홉 번째 딸인 융창공주(隆昌公主)를 도사로 만들었는데, 그 목적은 측천무후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서였다. 두 공주는 경운 원년에 입도하고, 그 다음 해 정월 18일에 대내의 도관(道觀)인 귀진관(歸眞觀)에서 삼동대법사, 태청관주 사승현에게 법록을 받았고, 서성공주는 ‘금선(金仙)’, 융창공주는 ‘옥진(玉眞)’이라는 도호(道號)를 쓰게 되었다. 두 공주의 록법회(籙法會)를 위해 3층의 록법단(籙法壇)을 새로 만들었는데, 단의 규모가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또 각종 신물과 법기를 완벽하게 구비했고, 세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향로, 안, 함, 낭, 번, 표기, 등을 마련하여 사람들이 무척 놀랐다고 한다. 단지 등(燈) 하나만을 보아도 그 종류가 수십 종이었는데,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동심지등, 분화지등, 연주지등, 관화지등, 전륜신등, 비태영등, 자염란등, 청광지등, 오성등, 필요등 도광등, 멸연등, 소화백지등, 월조천엽등, 이십팔수등, 삼십육천등 등이었다. 등수로는 를련화수, 은련화수, 칠보화수, 오색화수 등이 있었고, 등촉으로는 오색화촉, 금잔룡촉, 은상란촉, 천엽련촉, 구색운촉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하니 나머지 법기(法器)의 성대함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전대미문의 록법회(籙法會)는 모두 14일 동안 거행되었고 예종은 그녀들을 위해 장안에 별도로 금선관(金仙觀)과 옥진관(玉眞觀)을 지어주었다. 이 도관(道觀)을 짓기 위해 쓴 비용도 수맥만 민(緡)이었다고 한다. 두 공주는 일찍이 화산(華山) 태화봉(太華峰)에서 수행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이백(李白)의 작품 ‘옥진선사’에서 “옥진 선인(仙人)이 태화봉을 간다”는 시구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두 공주는 또 사천 청성산의 조사전에서 금단(金丹)을 완성하고 선인(仙人)으로 화(化)했다고 한다. 당시 그녀들이 향불을 사르는 데 사용했던 비룡정(飛龍鼎)이 현재까지 환현 이퇴공원 복룡관9伏龍觀) 내에 있는데, 그 무게만도 천근이고 솥의 중앙부에는 여섯 용이 날아갈 듯 생동감있게 새겨져 있다. (지금도 화산(華山) 대상방(大上方) 기슭에는 곽종인 대사님의 선연(先緣)인, 금선공주의 수행터 유적 금선궁(金仙宮)이 있다. 원래는 세채의 궁관이었으나 문화혁명때 소실되어 무너지고 사당과 터전, 석재등이 남아 있다.) -원문 : 張恩富 道家簡史 北京华龄出版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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