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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노조(陳摶老祖) 희이선생(希夷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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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자운
등록일 16-01-09 14:44
조회 708
진단노조 (陳摶老祖)의 초상화
진단노조(陳摶老祖) 희이선생(希夷先生) 수공(睡功)의 대가(大家)이자 도가역학대사(道家易學大師) 진단노조 (陳摶老祖)의 자는 도남(圖南)이고 호는 부요자(扶搖子)이다. 보주(普州) 숭감(崇龕)(지금의 중경에 속한다) 사람이다. 오대(五代) 송초(宋初)의 저명한 도사(道士)이며, 역학대사(易學大師)이고 삼교(三敎)의 학문에 통달했다. 진단노조는 오대에 태어났는데, 어부가 강에서 발견해서 얻었다한다. 그래서 어부의 성인 진(陳)씨를 따랐다고 한다. 일찍이 젊어서부터 경사(經事)와 백가(百家)의 언사(言辭)을 숙독했고, 더불어 의리(醫理), 불학(佛學)에 통했으며, 천문지리와 역사백가의 서학에 밝았다. 시문(詩文)으로도 상당히 이름이 있었다. 후당(後唐) 장흥 연간, 진사시 과거에 오르지 못하자 결국 벼슬을 구하지 않고, 山水에 거함을 낙으로 삼았다. 무당산(武堂山) 구실암에서 20여년 은거하며, 태식복기(胎息服氣), 벽곡(辟穀), 도인(導引), 내양정공(內養靜功)의 수련에 전념했다. 촉(蜀)지방에 있을 때에는, 일찍이 공주 천사관의 도위인 하창일에게 수공(睡功) “쇄비술(鎖鼻術)”을 배웠다. 이것은 전해지기를 한번에 3년이라도 잠을 잘 수 있다고 하며, 일명 ‘오룡반체수수공’이라고도 한다. 또한 유명한 수공도(睡功圖)가 후대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진단노조가 무당산에서 수련하던 기간에는 은사인 여동빈(呂洞賓), 이기(李琪) 등과 왕래교류를 밀접하고 깊게 했다. 뒤에 후주의 세종이 진단을 초빙하여 입궁하게 하여 신선, 황백, 연단 등의 사항을 물어보았다. 이에 진단이 답하기를 “폐하는 사해의 주인으로서, 응당히 세상을 잘 다스리는 정치에 몰두하셔야 하는데, 어찌하시어 황백, 연단술 같은 사소한 일들에 뜻을 두십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세종은 진단에게 ‘백운선생’이란 호를 내렸다. 진단노조는 중국 당말에 태어나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혼란기를 거쳐 송초까지 살았다. 이 시기에 주전충이 황소의 난을 토벌하고 점차 세력을 키워 국호를 ‘양’(梁)으로 바꾼 후, 290년간 이어온 당나라를 서기 907년에 역사의 막을 내리게 한다. 그 이후 960년 송나라 건국 때까지는 50여 년간 오대십육국의 혼란한 시기였다. 이 반세기 동안에 중국의 왕조는 다섯 번이나 바뀌었고 작은 국가들도 열이 넘었다. 각 나라의 집권이 십여 년에 불과하니 세상은 극히 혼란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흉흉했다. 진단노조는 흉중에 제세경국의 큰 자질을 지니고도 산속에 은둔하며 다섯 왕조의 잦은 명멸을 마냥 지켜볼 뿐이었다. 한 왕조가 망하고 또 다른 왕조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늘 마음을 아파했고, 그는 이러한 심경을 율시로 읊었다. 十年踪迹走紅塵 십년종적주홍진 回首靑山入夢頻 회수청산입몽빈 紫陌縱榮爭及睡 자맥종영쟁급수 朱門雖貴不如貧 주문수귀불여빈 愁聞劍戟扶危主 수문검극부위주 悶聽笙歌聒醉人 민청생가괄취인 携取舊書歸舊隱 휴취구서귀구은 野花啼鳥一般春 야화제조일반춘 십년의 발자취 홍진 속에 빠졌었는데 머리를 청산으로 돌려 자주 돌아가는 꿈을 꾸었네 도성의 길이 비록 영화롭지만 한가한 수면에 미치겠는가 화려한 저택이 보귀하다지만 빈한함보다는 못하다 근심많은 군주를 창검이 보호한다는 말 걱정스레 들으며 생황소리 노랫소리, 취객의 왁자한 소리 듣기도 민망하다 오래된 서책들 챙겨서 옛날 은거지로 돌아오니 야생화 피고 새우는 봄은 예나 같구나 후주 세종 현덕 말년에 진단노조는 나귀를 타고 유주를 떠났는데, 돌연 황제의 재목으로 여기던 조광윤이 새롭게 중원의 정권을 잡고 송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뻐서 대소하다 나귀에서 떨어졌는데, 다시 가로되 “이제 비로소 천하가 안정되는도다”라고 했다. 즉시 화산에 들어가 도사가 되었고, 운태관과 소화석실에서 머물렀다. 훗날 이 고사를 두고 조선시대 윤두서(尹斗緖)의 진단타려도(陳摶墮驢圖)를 본 숙종(肅宗)임금은 시를 지었다. 希夷何事忽鞍徙 희이하사홀안사 非醉非眠別有喜 비취비면별유희 夾馬徵祥眞主出 협마징상진주출 從今天下可無悝 종금천하가무리 희이선생 무슨 일로 홀연 안장에서 떨어졌나 취함도 아니요 졸음도 아니요 따로 기쁨이 있었다네 협마영에 상서로움 드러나 참임금(송 조광윤)이 나왔으니 지금부터 천하엔 근심이 없으리라. 송 태종은 이미 두차례 진단노조를 궁으로 초빙했는데, 대우가 무척 두터웠다. 그는 태종에게 “널리 현사를 초빙하고, 가까이는 간신을 물리치시길 바라며, 백성들의 세금을 감하고, 삼군에게는 중한 상을 하사해 주십시오”라고 건의했으며, 태종이 공경스럽게 깊이 받아들이고 총애하고 신임했으며, ‘희이선생’이란 호를 내렸다. 이 ‘희이’의 유래는 노자 도덕경 14장에서 나온다. “이를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니 ‘이’(夷)라고 하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이니 ‘희’(希)라고 한다.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한때 진단이 전왕조의 부름에는 응했으나 송 태종은 만날 수가 없자, 조서를 보내, 이제 만약에 조정의 부름에 따르고 바둑을 두어서 이기면, 화산의 세 봉우리를 모두 그대에게 주겠다고 했다. 이것을 받은 진단노조는 비로소 부름에 응하고, 궁전에 들어가 먼저 쉴 수 있는 ‘건륭관’(建隆觀)에서 문을 닫고 일 개월 동안 잠을 잔 후에 화양건(華陽巾)을 쓰고, 조정으로 나아가 황제를 알현했다. 송태종은 ‘연영전’(延英殿)에서 귀빈의 극진한 예로 진단을 친견하고 오랫동안 담소를 나누었다. 이때 진단이 황제와 바둑에 이긴 후 화산을 하사받을 때, 그 증명으로 받은 옥쇄가 화산파에 전해져 내려온다. 진단노조의 도교사상은 유,불,도 삼가학설을 융합하여 관통하고 있어서, 당시의 시대적인 흐름인 삼교합일 사상조류에 영향과 일깨움을 주었다. 그의 도교 단도 사상은 성명쌍수, 양생내련, 징사식려, 조기입정, 순기자연을 주창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도가학설을 핵심으로 유가와 불교의 선정사상을 흡수하여 체계적인 계통의 내단이론을 만들었고, 이는 송, 원 도교 내단파 형성에 기초를 다지고 안정시켰다. 진단노조는 일생 동안 노자와 주역에 있어 모두 공적을 세웠다. 그의 노자 학문은 제자 장무몽을 통하여 진경원에게 전해져, 송대 이후 도교교리의 연구와 토론을 촉진시켰다. 역학방면에서는 역경을 애독하여 손에서 놓지 않았고, 항상 스스로 호를 부요자라 칭하는데 역경으로부터 나온 호이다. 송대의 역도인 역룡도, 태극도, 무극도 등의 많은 수가 전진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상수역학을 부활시켰다. 그는 역학을 검증하기 위해서 도설을 발명했고, 상수를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서 수로 도를 부연했으며 도로 수를 표시했다. 이러한 방법은 이전 상수학에 있던, 번거롭고 복잡하며, 결핍된 주해방식을 개선시켰다. 또 주역의 본의에 의거하여 시, 괘, 효 등의 문제를 명밀하게 찬술했고, 주역의 이치로 현학의 중요 의의을 비판했다. 진단의 도서학 또한 후세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그와 제자들에게 전승된 도서학은 계속해서 송대의 학자들에게 주지되어, 송학의 중요 조성부분이 되었다. 특히 주자의 주역본의에 이론이 차용된 이후, 그의 명망이 주자의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같이 올라갔다. 이들 성리학자들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진단의 명성도 더불어 높아졌다. 이와 같이 도가의 문화는 빠르게 유가의 사상에 흡수되어 발전했고 마침내 국가에서 공인된 정통학문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고, 중국문화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중국의 의학, 병법, 단술, 산술학, 문학, 둔갑 등 학문 모두는 그것을 끌어들이고, 흡수했다. 그러므로, 진단노조의 역학과 중국문화에 대한 공헌은 영원불멸이다. (원문-道家簡史 張恩富 北京华龄出版社, 참고인용-神仙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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